심금 울리는 우리나라의 현악기
심금 울리는 우리나라의 현악기
거문고, 가야금, 아쟁, 해금 등의 우리나라의 전통 현악기는 독주 음악에서는 개성 넘치는 음악세계를 선보이며 여러 악기와 합주할 때는 소리와 여백 사이를 넘나들며 한국음악 특유의 정서를 이끌어갑니다. 60여 가지가 넘는 우리나라 국악기 중 현악기는 가야금, 거문고, 해금, 아쟁, 금, 슬, 양금 등입니다.
그런데 같은 현악기라도 악기의 구조와 연주법에 따라 이들은 각기 다른 특징을 드러내며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의 음악 마음을 표현해왔습니다. 가야금, 거문고, 금, 슬, 양금은 손가락이나 채로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로 소리의 여음이 짧아 음과 음 사이에 여백이 있고, 활로 줄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인 해금과 아쟁은 관악기를 연주할 때처럼 음을 지속할 수 있어 표현력이 풍부합니다. 이 현악기들은 각각의 독주음악에서 고유한 음색과 음향으로 개성 넘치는 음악세계를 펼쳐내며, 여러 악기와 합주할 때는 소리와 여백 사이를 넘나들며 한국음악 특유의 조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오동나무와 명주실의 하모니
<오동나무 -출처 : 네이버 백과->
우리나라 현악기의 주재료는 오동나무와 명주실입니다. 거문고, 가야금, 아쟁은 오동나무 공명통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걸어 연주하고, 해금은 대나무통 양쪽에 얇은 오동나무 판을 붙여 공명을 얻습니다. 오동나무는 바이올린의 공명통으로 사용되는 단풍나무에 비해 재질이 무르고 나무의 조직이 아주 성글죠. 그래서 높고 단단한 소리가 아닌 낮고 무른 소리를 내는 데 더 적절합니다.
실제로 유럽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과 우리의 거문고 공명통의 울림을 기계로 측정해보면 소리 전달력과 음의 파형이 뚜렷이 구분됩니다. 나무의 수종이 아주 다양한 우리나라에서 오랜 세월 동안 현악기의 공명통 재료를 바꾸지 않고 오동나무 공명통을 고집해온 것은 저음역대의 부드러운 음향을 즐겨온 한국인의 음악심성이 반영된 결과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명주실을 뽑아낼 수 있는 누에고치 -출처 : 네이버 백과->
한편, 우리나라 현악기의 줄은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명주실입니다. 아주 가는 명주실을 수백 가닥을 꼬아 특수 가공하여 만든 현악기 줄은 명주실로 짠 비단옷감 보다 수백 배 수천 배 강한 성질을 띱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현악기의 철현에 비해서는 약하고, 습기에도 민감하며 소리가 작아 불편한 점도 있지만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소리를 냅니다. 이렇게 나무의 조직이 무르고 성긴 오동나무와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명주실의 만남은 높고 쨍하여 폐부를 찌르는 명징한 소리가 아닌 낮고 부드러운 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은근하게 스며듭니다.
본래 악기의 주재료는 자연에서 얻기 때문에 지역과 기후 등의 자연환경과 민족성에 따라 악기 재료의 선호도에 큰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서구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악기 개량을 통해 목관악기의 재료가 금속으로 바뀌고, 현악기의 줄도 철현으로 변화하여 식물성 재료의 친자연성을 지닌 우리나라 악기와는 많이 다릅니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 악기들은 금속성의 차갑고 이지적인 소리 이미지와 대비되는 순하고 따뜻한 정서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야금과 거문고
<거문고 연주가 고지영 독주>
가야금은 ‘가야국에서 탄생한 악기’라는 뜻에서 가야금이라 불렀습니다. 현재 가야금은 가야의 옛 형태를 간직한 풍류가야금(또는 정악가야금)과 19세기 말엽 산조의 발생과 함께 탄생된 산조가야금, 현대에 들어 개량된 25현가야금 등이 있습니다.
전통 가야금은 모두 12현을 가졌고, 공명통 위에 ‘안족’이라 부르는 줄기둥을 세워 줄을 건 다음, 악기를 무릎에 올려 놓고, 오른손가락으로는 줄을 뜯고 튕기고, 왼손가락으로는 줄을 흔들고, 떨고, 누르고, 굴러 다양하게 음색을 변화시키며 연주합니다. 낮은 음역, 중간 음역, 높은 음역을 오르내리며 손가락 끝 부분으로 줄을 뜯고 손톱으로 줄을 튕기는 오른손 터치와 왼손 놀림에 의한 미세한 변화가 어울려 가야금 특유의 소리가 완성됩니다.
거문고도 가야금처럼 긴 네모형의 공명통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는데, 거문고에는 키 높이가 서로 다른 열여섯 개의 괘(프렛 fret)를 붙이고 그 위에 여섯 줄을 건 다음, 오른손에는 ‘술대’라고 부르는 작은 막대를 쥐고 현을 치거나 뜯어서 연주하고 왼손으로는 괘를 짚어 음정을 내고, 그 음을 움직여 소리에 변화를 줍니다. 또한 거문고를 연주할 때는 여섯 줄 중에서 주로 두 줄만 사용하게 되는데, 줄의 굵기가 서로 달라서 선율을 연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소리의 명암이 연출됩니다. 오른손에 든 술대를 힘 있게 내리쳐 장대한 울림을 얻어내고, 줄을 밀어 연주하는 ‘역안법’으로 음의 변화를 표현하는 거문고의 매력은 굵은 줄에서 나는 짧은 여음과, 그 여음 뒤에 생기는 음의 여백에서 더욱 돋보입니다.
해금과 아쟁
<꽃별밴드 해금 연구>
해금(奚琴)과 아쟁은 줄을 활로 문질러 연주하는 찰현악기입니다. 해금은 자그마한 공명통, 가슴에 폭 안길 만큼 키가 작은 입죽(立竹)에 두 줄을 걸어 연주합니다. 이때 줄은 팽팽히 조이지 않고 역시 단단하게 묶지 않은 활대로 줄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데, 음을 지속하며 연이어 낼 수 있다. 특히 해금은 지판(指板)을 짚지 않고 줄을 움켜쥔 채 당겼다 늦췄다 하면서 연주하기 때문에 현에서 나오는 그 소리 변화는 마치 사람 목소리처럼 자유롭습니다.
<신기석의 아쟁 독주>
한편, 가야금처럼 뉘어놓고 나무 활대로 현을 문질러 연주하는 아쟁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찰현악기입니다. 전통적으로 궁중음악에 사용된 대아쟁부터 산조아쟁, 현대의 창작음악용 아쟁까지 종류가 다양하고 각 종류마다 줄 수도 6현에서 9현까지 각기 다릅니다. 아쟁은 오랫동안 궁중음악 합주에서 저음부를 받쳐주는 역할을 맡아 왔는데, 가야금처럼 줄 간격이 넓고 줄 수도 적어 같은 찰현류 악기인 해금에 비해 거친 소리가 납니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서는 아쟁으로 독주음악인 산조도 연주하고 시나위 합주나 극적인 표현을 필요로 하는 극음악, 무용반주 연주에서 아쟁은 ‘거칠거칠하고도 싱싱한 악기’ 소리로 생동감을 전해줍니다.
현악기의 음악과 연주가
<악기장 이영수 씨>
네 가지 현악기는 궁중음악부터 선비들의 풍류음악, 서민음악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궁중음악과 민속음악 합주에서 현악기들은 피리, 대금 등의 관악기와 함께 합주합니다. 이중에서 거문고와 가야금은 현악기가 중심이 되는 합주에서 주선율을 연주하고, 해금은 관악합주와 현악합주에서 관악기와 현악기 사이를 오가며 합주의 묘미를 살려냅니다. 그리고 음역이 낮은 아쟁은 합주의 저음부에서 유장함을 돋웁니다.
선비 풍류음악에서는 거문고, 가야금, 해금이 대금, 피리, 단소, 양금, 생황 등의 관악기와 어울려 연주되기도 하고, 여러 악기들이 각기 독주를 연주하는데, 오늘날 이 음악들은 각각 ‘거문고 정악’ ‘가야금 정악’ ‘해금 정악’ 레퍼토리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가락을 느린 템포로 연주하는 현악기의 정악은 매우 정적이고 명상적입니다. 여러 현악기의 정악 연주는 국립국악원 정악단에서 오래 활동하거나 정악 전문 연주 그룹인 ‘정농악회’ 출신의 음악가들이 명연주자로 꼽히는데 거문고는 이세환, 이오규, 가야금 정악독주는 김정자, 최충웅, 해금 정악은 양경숙의 음반에 다양한 레퍼토리가 담겨있습니다.
한편, 민속음악 중 각 악기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음악은 산조입니다. 가야금산조, 거문고산조, 해금산조, 아쟁산조가 있고, 각 산조마다 명인의 계보가 있습니다. 가야금산조는 김죽파류, 성금연류, 최옥삼류, 김윤덕류, 서공철류가 대표적이고, 거문고산조는 신쾌동류, 한갑득류, 해금산조는 지영희류, 김영재류, 아쟁산조는 윤윤석류, 서용석류가 있습니다.
각 악기의 산조는 각 유파를 탄생시킨 원조 명인부터 수많은 후계자들의 음반과 실연을 통해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의 현악기들은 새로운 창작음악의 세계를 열어가는 현대 국악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가야금오케스트라, 거문고합주단, 해금앙상블 등 동종 악기를 합주하는 새로운 공연 형태가 선보이는가 하면, 독주 영역에서도 개성 넘치는 솔리스트들이 오래된 전통악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중입니다.
연주 단체 중에서는 각 악기별로 숙명가야금연주단, 거문고 팩토리, 해금연주단 ‘이현의 농’을 꼽을 수 있고, 각 악기의 솔리스트 중에서는 가야금에 황병기, 김일륜, 이지영 등이, 거문고에는 허윤정, 해금에는 성의신, 정수년, 강은일, 김애라, 노은아, 이꽃별 등이 다양한 연주활동을 통해 오늘의 우리 음악의 토대를 쌓아가는 중입니다.
출처 : 사외보 아주좋은날 2014.05+06월호
<IN MUSICAL INSTRUMENTS 특별한 악기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