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와 다른 브랜드를 쓰는 사람들을 비하할까?
왜 나와 다른 브랜드를 쓰는 사람들을 비하할까?
'앱등이', '삼엽충', 갤레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뭐였더라? 싶진 않으신가요?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말이 속속 탄생하는 요즘이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터. 그런데 이 신조어들은 특정 집단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사용되니 남다릅니다. 삼엽충, 갤레기는 애플 팬들이 삼성제품을 조롱하는 말인 반면 앱등이는 삼성 팬들이 애플 팬을 비하하는 단어입니다. 태블릿 시장에서 삼성과 애플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지지하다 못해 상대를 대놓고 험담하며 충돌하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자유가 존중되는 현대 민주사회에서 그들의 시간만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좋아하면 그만인 거지, 그 브랜드를 쓰지 않는다고 남을 비하하는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 충성심, '어마무시'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해 '응사앓이' 열풍을 일으킨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속 여주인공 시원(정은지 분)은 '토니 부인'이란 닉네임처럼 1997년 당시 가요계를 평정했던 그룹 중 하나인 H.O.T의 멤버 토니 안의 열렬 팬으로 오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당시 경쟁그룹 젝스키스 팬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상대방이 H.O.T를 비방하기라도 하면 머리채를 잡고 코피가 터지는 격투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드라마 속보다 더 심한 것이 현실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스타의 실수는 이유 불문으로 미미한 것이며 스타의 정상 등극을 위해서라면 밤새 광클(미치도록 빠른 클릭)도 마다치 않습니다. 스타의 생일날 방송국에 떡을 돌리는 것은 기본, 그(혹은 그녀)의 이름으로 통 큰 기부도 하며 못마땅한 캐스팅이나 대접에는 공식적인 성명으로 바로잡는 등 21세기형 팬심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입니다.
(세계적인 오토바이 브랜드 '할리데이비슨' -출처 : 위키피디아-)
말발굽 소리에 비견되는 중저음의 엔진 소리와 거친 남성미를 발산하며 하나의 문화로 상징되는 미국의 고급 모터사이클 브랜드 할리데이비슨. 이 할리데이비슨도 1980년대 한때 존폐 위기에 몰린 적이 있습니다. 불경기에 엎친 데 엎친 격으로 일본 후발업체의 추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회사를 살린 것은 다름 아닌 '호그(HPG : Harley Owner's Group)였습니다.
'호그'는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로 회사가 열세에 몰리자 다양한 행사를 주선하며 기발한 제안을 쏟아냈고, 자진해서 모금을 주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인기리에 방영된 미국 드라마 LOST -출처 : 엔하위키-)
배우 김윤진의 출연으로 더 관심을 모았던 미국 ABC 드라마 '로스트'는 정체불명의 섬에 불시착한 비행기 생존자들의 탈출기를 그린 미스터리물입니다. 방영 당시 독특한 소재와 탄탄한 구성으로 엄청난 국제 팬들과 컬트 문화를 만들어낸 작품이죠. 그런데 에피소드 '저주받은 숫자' 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용에 미지의 숫자 '4, 8, 15, 16, 23, 42'가 등장하는데, <피츠버그 트리뷴>에 의하면 당시 복권에 이 숫자들을 넣는 사람들이 500명을 넘었고 미시간에도 200명 이상이 이 숫자들을 복권에 넣었으며, 이후 파워볼 복권에도 이 숫자를 넣는 사람이 급증했다고 합니다.
한 스타, 한 브랜드, 하나의 특정 드라마에 열광하는 팬들의 전폭적인 사랑과 의리, 또 그로 인한 파급력이 정말 어마무시합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삼성과 애플의 주력 태블릿 PC '갤럭시탭'과 '아이패드' -출처 : 위키피디아-)
사랑하는 스타를 위해 모든 것을 올인 하고, 선호 브랜드를 헐뜯는 경쟁사에 거침없이 전쟁을 선포하는 심리. 그들은 평범한 팬, 특정 브랜드에 홀릭한 마니아란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들을 위한 용어는 따로 있습니다. '팬덤'이 그것입니다. 팬덤(fandom)은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unatic)'의 팬(fan)과 '영지', '나라' 등을 뜻하는 접미사 '덤(dom)'을 조합한 합성어로 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집단, 또 그런 문화 현상을 말합니다.
스타에 열광하는 팬클럽이 가장 대표적이긴 하지만, 브랜드와 도시, 식품, 예술 작품 등 팬덤의 범주는 경계가 없습니다. 공통점은 있습니다. '편향'. 쉽게 말해 어떤 특정한 것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콩깍지가 쓰인다는 것이죠. 자신의 기호가 주류라 굳세게 믿다 보니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비주류로 전락합니다.
애플과 삼성이 실제 시장에서 벌이는 경쟁보다 각각의 팬들이 온라인상에서 벌이는 혈전이 더 치열한 것도 이 팬덤 현상에서 비롯된 셈입니다. 개인의 독특한 취향이나 기호를 넘어 선호 브랜드와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마니아, 오타쿠와 구별되고 그래서 팬덤은 팬 이상의 적극성과 영향력을 갖습니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 '슈퍼브랜드의 비밀'에서 애플을 지지하는 젊은 팬층, 일명 '애플 팬보이'의 뇌를 자기공명영상으로 스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팬보이들에게 애플 기기를 보여주자 뇌의 특정 부위가 일부 밝아지는 현상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도들에게 그의 종교와 관련된 이미지를 보여줬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같다고 방송은 밝혔습니다. 애플만이 아닙니다.
페라리, 할리데이비슨과 같은 브랜드 역시 같은 효과가 있음이 기사화된 바 있습니다. 소비가 목적인 브랜드(상품)에 종교적인 몰입도에 비견되는 신념이 형성됐으니, 팬덤의 지지가 그렇게 절대적일 수밖에요.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팬덤이란 단어에 이미 이런 결과를 예고하는 단서가 숨어 있었습니다.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은 원래 라틴어 '파나티쿠스(fanaticus)'에서 유래한 말로,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오늘날 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고 몰입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죠. 애플 팬보이에게서 발견된 종교와 같은 몰입과 파나티쿠스에서 비롯된 의미. 정말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팬덤이 이 정도의 충성도를 가진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에 대한 공격은 곧 자신에 대한 공격, '앱등이', '삼엽충'이란 거친 태클로 일부 수긍됩니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충성심은 대체 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달라진 보이지 않는 손, "그거 사랑 아냐...?"
터틀넥과 청바지, 뉴발란스의 'mr993' 모델을 신은 파격적인 의상의 한 프리젠터가 무대에 섭니다. 의상만 파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간결한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더 인상 깊었고 그가 선보인 기기는 혁신이었습니다. IT 업계 전설, 애플 내부에서도 '아이갓(iGod)'으로 칭송되었다는 스티브 잡스입니다.
애플은 이런 스티브 잡스의 독보적인 능력과 매력에 더해 "Think different"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애플 기기를 사용하는 소비자들에게 당신은 잡스처럼 남들과 다른, 창의적이면서도 혁신적인, 가장 진보적이고 세련된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논리상으론 비약임이 틀림없지만, 소비자들은 아이팟을 사용함으로써 혁신적인 사람, 이 시대를 앞서가는 트렌드 세터가 되었다는 희열을 분명 느꼈을 것입니다.
세간에서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추종과 맹목적인 사랑이 이유라고 봤지만, 애플이라는 상품이 주는 업그레이드된 아이덴티티, 그것이 바로 애플 팬덤의 진정한 동력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생수 '에비앙'이 패션 아이콘이란 메시지로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고 숱한 프리미엄 상품들이 더 비싼 가격에도 인기를 끄는 것 역시 애플과 같은 맥락의 팬덤 효과 덕입니다.
200여 년 전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펼치며 시장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가격'임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보이지 않는 손은 더 이상 가격이 아닙니다. 소비자들은 브랜드를 상품적인 가치로만 보지 않습니다. 많은 브랜드들이 실용적인 효용을 말하기에 앞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마음에는 이성이 모르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상품은 의외로 돌풍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어떤 상품은 선두에 섰다 한순간 시장에서 퇴출당하기도 합니다. 소비를 담당하는 단순한 행동 주체가 아닌, 상품의 운명을 좌우할 영향력과 힘을 갖고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팬덤이 된 소비자 덕입니다.
대중의 가슴에 울림을 만들 수 있는 메시지, 공감을 끌어내는 브랜드가 성공적인 브랜드로 안착하고 그 브랜드는 다시 더 많은 팬덤을 확보하는 선순환 고리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브랜드나 상품만 그럴까요? '내'가 그대로 경쟁력이 된 시대, 나란 브랜드에도 이성적인 매력 이상의 공감 능력이 필요합니다.
출처 : 웹진 Pioneer 133호(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