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단] 서창범 매니저의 <나?>
고즈넉한 밤입니다. 퇴근 후에 이어지는 '육아'라는 후반전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자정이 살짝 넘었네요.
최근 며칠 동안 연이은 연말 술자리를 버텨내야 했고, 오늘은 업무 강도도 만만치 않았던 관계로 바로 이불 속에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모레는 소통단 게시물의 마감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제도 한참 전에 주어졌겠다. 좀 미리미리 하지 그랬냐고 채근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왜 늘 이렇게 코앞까지 닥쳐서야 움직이게 되는 걸까요.
이 글은 6개월간의 소통 활동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게시물입니다. 한 달에 글 한 편. 가볍게 생각하고 도전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신변잡기의 글을 써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고, 회사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Blog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고 유익하면서도 회사의 이미지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소재를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저희의 어려움을 헤아리셨는지 주관 부서에서 마지막 글은 주제를 정해주시겠노라 하시더군요.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단계가 줄어드는 셈이니 한결 수월하겠다 싶었죠.
하지만…. 우리가 받아든 소재는 바로 다름 아닌 ‘나’였습니다. 이게 참 애매했습니다. 주제가 없을 때보다 더 종잡을 수가 없었죠.
정말 자연인 '나' 대한 글을 써야 할까? 그게 정보로서 가치가 있을까? 회사 Blog에 올릴 만한 ‘나의’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서 써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나의’로 수식될 수 있는 ‘무엇’이란 건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후자여야 한다면 주제를 안 정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또 한 달을 훌쩍 보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감이 임박하여 쫓기듯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습니다. 나의 ‘무엇’들에 대해 몇 가지 써 보자. 그것들이 모여 결국 나를 이루는 것이므로 양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정보로서의 가치야 없겠지만 가급적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아서.
왕년에 동네 노래방에서 마이크 좀 돌렸었습니다. 노래를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고, 사람들 앞에서 익살을 잘 떠는 수준이었죠. 그런데 소발에 쥐가 잡혔습니다. 대학교 신입생 때 학교 가요제에서 스피커 위에 발을 올리는 허접한 퍼포먼스로 객석의 웃음을 자아내 2등 상을 타게 된 겁니다. 노래 실력보다는 객석의 반응으로 시상을 하는 그렇고 그런 가요제였던 거죠.
한 번의 성공 경험으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저는 그 후 대학가요제에 나가겠노라고 설치고 다녔습니다. 노래도, 작곡도, 연주도 정말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는데 말입니다. 전화로 아버지께 참가 결심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가까운 약국에 들러서 ‘꿈 깨라 마이신’을 하나 사먹으라.” 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말도 안 되는 도전의 결말은 당연히 예선 1차 탈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은 저 자신에게 무척 소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실현 가능성보다는 하고 싶다는 욕구에 집중하고, 생각에 머물지 않고 실천에 옮기니 가시적인 무언가가 계속 생기기 시작했던 겁니다.
저와 비슷한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과 팀을 만들게 되었고, 곡이 나왔고, 연습실을 빌렸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편곡을 했고, 돈 한 푼 없이 녹음실에서 녹음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완성곡 CD를 받아들고 기쁨에 겨워 친구와 팔짝팔짝 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대가를 보장할 수도 없는 무리한 요구였음에도 많은 분들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선뜻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고, 그로 인해 도저히 방법이 없을 것 같던 것들이 해결되었습니다. 너무 교과서 같은 말이어서 쓰기 싫지만 정말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나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너무 움츠러들어 있는 건 아닌지…. 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때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새삼 오늘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렇게 정신머리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던 저에게도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영장을 거머쥐게 된 것이죠. 그때 생겼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훈련소에 입소할 적 일입니다.
“가방은 반입이 안 되니 필요한 물품은 쇼핑백에 가져가야 한다.” 는 친형의 얘기를 듣고 보급품 지급 이전 하루 이틀 입을 속옷을 쇼핑백에 넣어 갔습니다.
“막 협박하면서 숨겨둔 담배 다 꺼내 놓으라고 할 거거든. 내 말 믿어라. 검사 안 한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흡연자였던 저를 위해 쇼핑백 밑바닥에 담배를 깔아주면서 형은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훈련소에 도착해 보니 다들 멀쩡한 가방들을 메고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쇼핑백을 들고 온 사람은 제가 유일했습니다. 훈련소까지 따라온 형한테 이게 뭐냐고 따져 물었더니 “어라, 우리 때랑 많이 다른데?” 하고 말더군요.
이때부터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담배도 검사하는 걸로 바뀐 거 아냐?”
얼렁뚱땅 입소 기념행사가 끝나고, 가족들도 모두 떠났습니다. 입소자들만 덩그러니 남은 연병장에 곧 빨간 모자의 교관들이 우르르 등장하기 시작했죠. 입소자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담배를 꺼내라고 악을 써대기 시작했습니다. 겁을 집어먹고 담배를 교관의 손에 쥐어주는 입대 동기들도 많았지만 저는 내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죠.
‘순진한 놈들. 후후~’
그때 마침 흐렸던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고 간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부동자세로 한 시간여를 기다리면서 제 쇼핑백도 촉촉하게 젖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온 이동의 시간.
"1열부터 10열까지 일어서!! 뛰어!! 가!!"
땅바닥에 내려놓았던 쇼핑백의 손잡이를 잡고 뛰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툭!'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쇼핑백의 무게감이 확 사라져 버렸습니다!
물을 먹어서 흐물흐물해진 쇼핑백의 밑바닥이 터져버린 것이었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내 속옷과 담배들은 뒤따라서 뛰어오던 녀석들의 발에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하지만 그걸 줍자고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도착지에 멈춰 서자 뒤에서 따라오던 교관이 흙 바닥에 뒹굴어 처참해진 속옷과 담배를 주워들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습니다.
“이거 어떤 xx 거냐."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군 생활의 서막이었습니다. 그 사건 때문은 아니었지만 저는 공군의 무덤이라 불리던 '방공포병' 특기를 받고 30개월을 경계근무와 훈련비상 속에서 살게 되었죠.
물론 그 안에서의 생활이 다 나빴던 것은 아닙니다. 좋았던 기억도 있었고, 개인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부분도 많이 있었죠. 무엇보다도 제가 살면서 무언가를 가장 많이 읽고 썼던 시기가 군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건이 좋아서나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 때문에 말입니다.
물론 지금의 군대야 그렇지 않겠지만 제가 군에 있을 때 이등병은 내무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읽고 쓰는 것에도 제약이 심했죠. 편지도 화장실에서 써야 했고 일병이 되기 전까지는 무언가를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밖에서 그렇게 책을 열심히 보던 놈도 아니었지만, 일단 안 된다니 괜히 더 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좋은 생각>, <리더스>, <다이제스트> 같은 작은 책들을 (교회 덕분에 군대 안에는 이런 책이 많이 굴러다닙니다.) 건빵 주머니에 숨겨놨다가 화장실에서 몰래 읽거나 수첩을 들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짧은 일기를 썼습니다.
시간이 흘러 병장이 되고 나서도 흐르지 않는 시간과의 싸움을 위해 글의 힘을 빌렸죠. 야간 경계근무가 있는 날에는 근무지에서, 근무가 없는 날에는 전투복 수선실에서.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왔는지 참 부지런히도 읽고 썼던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쓴 글들 중에 조금이라도 쓸만한 구석이 있었다면 그때 그렇게 누적된 시간들 덕분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오랜만에 그 시절을 떠올려보니 또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며, 그때처럼 좀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렇게 2년 6개월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민간인이 된 저는 한동안 고향에서 보습학원 강사 생활을 좀 하다가 동기들보다 조금 늦게 복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대부분의 복학생들처럼 도서관 붙박이가 되어 갔죠. 같이 자취하는 같은 과 동기 녀석들 외에는 이렇다 할 대인관계도 단체활동도 없이 거의 알바와 공부만 하며 살았었습니다. 목전에 다가온 취업과 생존이라는 현실이 계속 저를 닦아세우던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무감과 고독감만 가득하던 대학생활 말미의 어느 날, 기말고사 기간을 맞아 밤샘을 각오하고 학교 도서관에 갔습니다. 시험기간이어서 자리가 많지 않더군요. 늘 앉던 제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준 저는 대충 빈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평소에는 선호하지 않았던 칸막이 없는 자리여서 이거 좀 안 풀린다 싶었는데,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죠. 덕분에 지금의 집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옆자리에 앉은 여학우가 같은 과 후배라며 저에게 목례를 하더군요. 그리고 새벽 두 시 경이 되니 이 당돌한 후배가 출출한데 떡볶이나 같이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얼떨결에 따라나서 같이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그때 물어봤죠. 같은 과라고는 하지만 연결고리도 없고 말 한 번 나눠보지 않았는데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더군다나 복학 이후의 나는 완전한 투명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데.
대답을 들어 보니 꽤 오래전부터 저를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군대 가기 전 신입생 환영회 진행자로 무대에 섰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절 봤다더군요. 그녀는 당시 신입생으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입장이었고요.
입학해서 저 선배랑 친하게 지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 보니 제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랬겠죠. 그 행사가 입대 전 학교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이었으니까요.
둘 다 시험을 목전에 둔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떡볶이 회동은 짧게 끝맺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뒤로도 그녀와 저는 나란히 앉아 서로 음료나 과자를 건네며 힘겨운 밤을 배겨 냈습니다.
그렇게 보냈던 시간은 서로에게 묘한 동지애를 느끼게 했죠. 그 뒤로도 이런 저런 몇 번의 우연한 만남과 우연을 가장한 만남, 그리고 몇 번의 데이트를 통해 우리는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도 서로가 있었기에 좀 더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었죠. 제가 먼저 취업에 성공해 아주캐피탈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1년 정도 시차를 두고 그녀도 취업에 성공, 저희는 2011년 맞벌이 부부가 됩니다.
집사람과 저의 근무지는 무척 가깝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15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죠. 그래서 가끔씩 점심시간을 이용해 데이트를 즐기기도 합니다. 주로 서로의 사무실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즉석 떡볶이집을 애용하는데요, 우리 부부를 이어준 소중한 음식이기 때문……은 아니고 집사람이 떡볶이를 무척 좋아해서 자주 찾아갑니다. ^^
여기까지가 ‘나’의 ‘무엇’에 대한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뭐든 “저질러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된 6개월간의 소통단 활동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업무와 육아, 수시로 밀려드는 이런저런 약속들에 원고 마감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힘든 시간들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중한 기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더더욱 발전하는 아주캐피탈 소통단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 부탁 드리겠습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블로그에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