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움직여 희망을 움켜쥐어라!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몸을 움직여 희망을 움켜쥐어라!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무대 위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새입니다. 지면에 닿는 몸의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발끝으로 서서 언제든 우아하고 가볍게 날갯짓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예술감독이자 현역 발레리나 강수진. 40년 이상 몸을 단련해 온 그이가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건네는 행복 비결이 있습니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흠뻑 흘리세요. 그때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딱 하루만 주어진 것처럼
“수도 없이 매너리즘에 빠졌죠. 다리가 아파서 하루 종일 움직일 수 없을 때도 있었어요. 이십 대에는 서른 살이면 발레 인생이 끝날 거라 생각했고, 삼십 대에는 마흔까지일 거라 생각했죠.”무대 위 우아한 발레리나 강수진에게도 무대 아래 삶의 치열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삶의 기복이 있죠. 그러나 힘겨운 때일수록 남 탓을 하기보다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이는 열아홉에 1986년 슈트트가르트 발레단 최연소 단원으로 들어가 1997년 수석 무용수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주인공 같은 인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발레리나로서 정상에 이른 그이 또한 10년 이상 무대에서 군무를 췄었습니다. 언제까지 무대 위에서 발레리나로 설 수 있을지 불확실하고 불안했지만, 그이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발레리나로서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마음가짐과 행동이었습니다.
“매일매일 딱 하루만 주어진 것처럼 살았어요.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그날 정해진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냈죠. 무엇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매 순간 자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태우면서 살면 후회가 남지 않거든요. 그래야 결과가 어떻든 불행해지지 않습니다.”그이의 생활 철학은 ‘심플 마인드(Simple mind)’입니다. 일상은 최대한 간결하게 꾸립니다. 지금도 국립발레단과 집, 남편 툰치 소크멘과 강아지 써니가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 단순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이는 생활 속에서도 절제의 미덕을 발휘합니다.
무대 위 격정의 삶
어둠 가운데 쇼팽 발라드 1번이 울려 퍼지자 검은 베일을 쓴 얼굴에 검은 망토를 입은 마르게리트가 돌처럼 서 있습니다. 애인 아르망드가 다가와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그녀를 안고 거칠게 망토를 벗깁니다. 폐병에 걸린 마르게리트와 아르망디의 사랑의 몸짓이 우아한 격렬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강수진 씨가 아끼는 작품 <춘희>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여러 작품을 해왔지만, 스토리가 있는 발레가 저와 잘 맞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좋았어요. 발레를 통해 사랑에 미친 여인이 되어 보기도 하고, 버림받은 쓰라림으로 고통의 극한까지 가보기도 하죠. 현실에서는 겪을 수 없었던 특별한 삶을 무대 위에서 원 없이 산 셈이에요.”
그이는 무대 위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카타리나로, <춘희>의 마르게리트로, <오네긴>의 타티아나로 살았습니다. 줄리엣인 척, 카타리나인 척, 마르게리트인 척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만큼은 강수진 안의 줄리엣이었고, 강수진 안의 카타리나였고, 강수진 안의 마르게리트였고, 강수진 안의 타티아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이의 몸짓에서 줄리엣의 환생을 봅니다. 그렇게 강수진에게 빠져든 슈트트가르트 시민들은 그이를 그 도시의 뮤즈로 여기며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합니다. 일상의 삶이 절제와 균형으로 안정되어 있다면 그이의 무대 위의 삶은 굽이치는 격정 그 자체입니다. 이런저런 사소한 일로도 감정의 파도타기를 하며 사는 보통의 사람으로서 일상과 무대가 분리된 그이의 삶이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이 속내를 밝혔더니, 그이는 누구든 일상 속에서 자기표현을 통해 감정을 승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제가 발레를 하지 않았더라면, 심플한 강수진 외에 다른 강수진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제 내면의 여러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행복했죠.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마찬가지일거예요.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지만 잠재되어 있는 다양한 나의 모습이 있죠. 취미로 발레를 해도 좋고, 다른 춤을 배워도 좋고, 꽃을 가꾸거나 요리를 배우는 과정 속에서도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어요.”
아름다운 작별
반가운 소식이 들립니다. 올 11월에 강수진이 그이가 가장 아끼는 작품 <오네긴>으로 무대 에 오를 예정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번 무대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입니다. 그이는 은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은퇴 계획은 2014년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제안을 수락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아이디어였어요. 예술감독의 일은 후배들이 무대 위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거든요.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준비를 하자 하는 마음이 들었죠.”강수진은 은퇴를 선언하기 오래 전부터 작품마다 작별을 준비해왔습니다. 예를 들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마흔 다섯 무렵이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무대에서 열연을 하면서 직감적으로 ‘오늘이 줄리엣과 마지막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로미와 줄리엣>의 마지막 무대에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줄리엣이구나!’란 느낌이 왔어요. 최고일 때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오고 있었죠.”그날 그이는 공연이 끝나고 예술감독에게 아무 말 없이 눈으로만 ‘이 무대가 줄리엣의 마지막 무대입니다’라는 의미를 전했습니다. 강수진을 훤히 꿰뚫고 있는 예술감독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 경의를 표하는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강수진은 자신을 믿으며 그렇게 매번 깨어 있는 몸의 감각으로 판단해왔습니다. 무대 위에서의 삶이지만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주인공들을 떠나 보내는 데 왜 슬프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작별해야 합니다. 기왕 작별해야 한다면 최고일 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내자는 것, 그것은 그이가 오래 전부터 자기 자신과 한 약속입니다.
그러고 보면 작별(作別)의 사전적 의미는 ‘인사를 하고 헤어짐’입니다. 지을 작(作), 헤어질 별(別). 헤어짐을 짓는 강수진의 태도가 무대 위 몸짓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줄리엣과 마르게리티와 타티아나 또한 강수진의 몸을 통해 다시 태어나, 활짝 꽃 핀 듯 살아봤으니, 그이에게 어찌 고맙지 않을까요. 피어 있는 꽃도 아름답지만 질 줄 아는 꽃도 아름답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11월 6~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를 <오네긴>은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합니다. 시골 아가씨 타티아나는 사랑과 이별을 통해 성장하고 배움을 통해 성숙해져 갑니다. 한 여자로서 나이 들어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얼굴만 보면 믿기지는 않지만, 내년이면 그이 또한 쉰이 됩니다. “전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무심히 지나쳤던 꽃 한 송이도 이제는 새롭게 보이니까요. 요즘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죠. 그런데 희망은 내가 움켜쥐는 거예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요.”생각 따로 느낌 따로, 몸 따로 맘 따로 사는 이들이 많은 요즘 강수진은 몸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건강해진다고. 발바닥으로 걷는 것보다 발끝으로 걷는 시간이 더 많았을 그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인생은 굴러가요. 하지만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발휘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요?”몸부림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태어나지 못합니다.
출처 : 사외보 아주좋은날 2015. 여름호
CULTYRAL CREATIVE 우리 시대의 진정한 크리에이티브를 만나 봅니다
글. 곽문주 사진제공. 국립발레단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