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그것은 개척의 다른 이름이다
관찰, 그것은 개척의 다른 이름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의 한 구절입니다. 실제로 길가의 풀꽃들은 언뜻 다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나름대로의 특징과 매력을 발견해 새롭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200여 년 전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엄청난 존재를 앞에 두고 자세히, 오래, 그리고 끈질기게 관찰해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넘어 그 안에 든 놀라운 신비를 밝혀낸 인물. 뉴턴, 갈릴레이와 함께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과학자로 손꼽히는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입니다.
평범을 비범으로 싹 틔운 열정
장차 크게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다르다고 했던가요? 속담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의 주인공이 바로 찰스 다윈(Charles R. Darwin, 1809-18820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재나 천재였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심지어 다윈은 모범생도 아니었습니다. 분명 어린 다윈의 일화들은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남달랐습니다. 다윈이 직접 쓴 자서전 <나의 삶은 천천히 진화해왔다>에는 그 면면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다윈이 이 자서전을 쓰게 된 동기 또한 재미있습니다.
다윈은 독일의 한 편집자로부터 정신과 성격 발달에 대해 자서전을 쓰는 기분으로 가볍게 써달라는 청탁을 받습니다. 고민하던 중 그는 집필을 허락하기로 했는데, 이유는 바로 자신의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 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에게도 유익한 기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때문에 그는 최대한 잘 읽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다윈의 자손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들은 위대한 과학자의 삶을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만나보게 된 셈입니다. 다윈은 68세부터 73세에 이르기까지 총 6년 동안 이 자서전을 집필했는데 위대한 과학자로서의 면모는 태어났을 때부터 시간 순으로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고 있어 한 편의 서사적 이야기처럼 잘 읽힙니다.
자서전의 첫 번째 장인 어린 시절을 펼쳐보면 그야말로 태생적인 다윈만의 또렷한 성격과 기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밝혔듯 그는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시를 좋아하면서도 잘 외우지 못했고 전날 학교수업에서 배웠던 내용도 잊어버리는 일이 잦았습니다. 뛰어나지도 뒤쳐지지도 않는 평범한 학생이어서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혹시 조금 모자란 아이가 아닐까 염려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뛰어나지 못했어도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관찰력만큼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는 눈에 띄는 식물을 볼 때마다 이름을 알아냈고 조개나 도장, 서명, 동전, 광물질 등을 모으는 독특한 수집벽도 있었습니다. 진귀한 딱정벌레 두 마리를 잡았을 때 또 다른 종류가 나타나자 그 녀석도 놓칠 수가 없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입에 집어넣고 다른 놈을 잡았다는 일화나 꽃가루 입자를 관찰하다가 암꽃술이 돌출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해 교수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했다는 일화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다윈이지만 한때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의사가 돼보려고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다시 아버지의 권유로 목사가 되고자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학교를 옮기기도 했지만 그곳에서도 그가 기쁨을 느낀 건 오직 딱정벌레를 수집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자연과학이 운명이라는 듯 그의 관심과 열정을 이끈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의미 없던 케임브리지 대학이 다윈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운명을 바꾼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식물학과 곤충학, 화학 등에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식물학과 교수 헨즐로(John Stevens Henslow)가 그였습니다. 이 헨즐로 교수가 바로 다윈에게 비글(Beagle) 호에 승선하는 자연학자 자리를 주선해준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반대는 완강했지만, 다윈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습니다. 당시 22살의 앳된 청년이었던 다윈은 학자로서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않았음에도 용기를 내어 비글호에 승선, 그 해 12월 역사적인 항해를 떠났습니다.
비글호, 인류의 역사를 바꾸다
"비글호 항해는 내 생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내 인생의 진로 전체를 결정지어준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중략) 나는 이 항해로 내 정신 고양의 첫 관문을 통과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연사의 다양한 분야를 면밀히 관찰할 계기를 얻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미 어느 정도 길러져 있던 내 관찰력은 이 항해를 통해 한껏 향상될 수 있었다."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85쪽
찰스 다윈이 자서전에서도 고백했듯 그의 인생은 비글호 항해 전과 후로 나뉩니다. 21세기에도 고전으로 읽히는 <종의 기원>은 1831년부터 1836년 비글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면서 관찰한 결과물의 완결판인 것입니다.
약 5년 동안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섬 등을 둘러보며 다윈은 수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뱃멀미부터 향수병, 충격적인 브라질 노예 제도 등 온갖 몸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경험은 지적으로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항해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가본 여러 지역의 지질에 대해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등 커다란 지적 자극을 받아 지질학 탐사 중 동식물을 관찰한 결과를 수십 권의 노트와 수많은 표본들로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항해를 끝내고 돌아온 1837년부터 이 노트를 정리해 책을 쓰기 시작했고, 몸이 자주 아픈 중에도 집중해서 마침내 <종의 기원>을 완성했습니다.
<종의 기원>은 1859년 11월 출간되던 날 초판 1250부가 모두 매진되는 파란을 일으켰고 과학사에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신 중심의 창조주의가 지배하던 당시의 사회, 나아가 전 세계 과학계를 완전히 뒤흔들어놓았습니다. 이후 2판 3천부도 금세 매진됐습니다. 1876년 그가 자서전을 쓰고 있을 당시 영국에서만 1만 6천 권이 팔렸을 정도입니다. 자서전에서도 밝혔지만 <종의 기원>이 나온 후 그는 지지와 비판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종의 기원>을 두고 "다윈은 관찰 능력은 뛰어나지만 추론 능력은 형편없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종의 기원>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물학뿐만 아니라 여러 과학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운이 아닌 재능을 즐긴 개척자
다윈의 호기심 많고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기질은 그야말로 천부적이었던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에서도 다르지 않았으니 항해를 다녀와 엠마 다윈과 결혼해 첫 딸을 얻었을 때 아기가 다양한 방면의 표정을 처음으로 지을 때마다 즉시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는 독서에도 깊이 몰두했습니다.
"나는 다방면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학교의 두꺼운 담벼락 창틀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을 읽곤 했다. 바이런이나 스코트가 당시에 발표한 작품들을 읽거나 톰슨의 <시즌즈(Seasons)>를 읽기도 했다."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37쪽
독서 분야에 경계도 없었습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도 심취해 있었습니다. 서른 남짓한 나이까지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밀턴, 그레이, 바이런, 워즈워스, 콜리지, 셰리 등의 시에 푹 빠졌고 미술과 음악으로부터 기쁨을 얻었습니다. 자서전을 쓰던 나이에는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매력을 느껴 "모든 소설가들을 축복한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다윈은 자연과학에만 파묻힌 외골수는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즐기고 받아들일 줄 아는 유연한 사고를 가졌던 것입니다.
누군가는 다윈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운 좋게 비글호에 탑승해 그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그가 쓴 <비글호 항해기>의 탐사일지를 읽어본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실험과 관찰이 전부인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죽는 날은 관찰과 실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날이 될 것이다."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165쪽
일찍부터 자연과학에 대해 가진 남다른 애정과 재능을 파악해 열정을 다해 노력했던 사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잘했다.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 것처럼 다윈 그는 진정으로 재능을 즐기는 한편 누군가의 길을 무조건 따라 걷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부딪혀 새 길을 만들어간 강인한 개척자였습니다.
출처 : 웹진 Pioneer 147호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