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연결하다/컬쳐&트렌드

종이 위에 피어오른 한 줌의 향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5. 27. 09:49

종이 위에 피어오른 한 줌의 향기





숨어 사는 시인의 향기





매화의 향기는 맑고 깨끗합니다. 또 야단스럽지 않고 은은합니다. 향기에 품격을 매긴다면 매화는 최고 등급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매화는 숨어 사는 영혼이 맑은 시인의 꽃입니다. 세밀화를 그려 가는 화가의 손끝에 매화의 향기가 뿜어지는 듯합니다. 필자의 마당에는 꽃을 보기 위한 매화와 매실을 거두기 위한 매실나무가 여러 그루 있습니다. 


꽃모양은 조금 뒤지지만 향기는 매실나무 쪽이 더 좋습니다. 그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향기로 많은 벌들을 불러 모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실나무에 꽃이 활짝 필 때면 저는 어두운 밤에 그 향기를 찾아서 마당으로 나갑니다. 


이마가 선뜻해지는 초봄 저녁의 한기 속에서 한참씩 나무 밑을 거닐며 심호흡을 해봅니다. 꽃향기는 바람이 잦아드는 저녁시간에 강하고 멀리까지 갑니다. 좋은 것은 숨겨져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쪽으로 매화꽃 보러간다는 벗들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진정 매화의 맑은 향기를 만나고 싶거든 관광객들이 모두 가버린 저녁 시간에 호젓이 찾아가 보라고. 한 송이의 매화에는 동양 3국이 수천 년간 축적한 시와 글씨와 그림의 문기(文氣)가 농축되어 있습니다. 매화 앞에 서면 그 화려한 벚꽃이 조금 상스러워 보입니다. 꽃의 세력이 왕성한 것이 자랑일 뿐 향기도 없고, 기품도 떨어지죠.




첫사랑의 추억을 불러오는 향기 





라일락의 향기는 젊은 날의 기억을 불러냅니다. 필자가 다니던 대학 교정에는 유달리 키 큰 라일락이 많았습니다. 봄날 교정은 라일락 향기로 그득히 채워지고, 그 꽃그늘 아래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세상을 논했습니다. 라일락이 필 때면 마음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리운 얼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라일락이 피는 계절은 겨울의 흔적도 없고 여름의 예감도 없는 한봄입니다. 우리네 인생으로 치면 대학에 들어가서 늦추었던 사춘기가 본격 가동하는 때입니다. 세상은 온통 라일락 빛이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시절입니다. 흰 라일락의 꽃말은 순수, 겸손, 청춘의 순결입니다. 보라색은 첫사랑의 설렘입니다. 페르샤의 사랑 노래 한가락을 들어볼까요


“아름다운 그대여, 연보라 라일락으로/그대 머리에 씌울 화관을 짜게 해주오./장미로 그걸 짜는 연인은 낭패를 볼 걸/그 꽃 속에는 침을 가진 벌이 들었기에.”


라일락의 순수한 우리 이름은 수수꽃다리입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라일락 원종 13개 중 한국에서 나는 것이 5종이나 됩니다. 제 마당에 있는 미스킴 라일락은 우리 북한산 일대 바위틈에 자생하는 라일락이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 개량, 육종되어 역수입된 것입니다.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여인





아마릴리스는 한눈에 눈길을 확 끄는 꽃입니다. 그 이름도 생김새만큼 예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꽃은 향기가 거의 없습니다. 아름답지만 분위기가 없는 여인과 같죠. 그러나 향기가 약한 것이 장점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아마릴리스가 실내원예에서 사랑받는 것은 향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향기가 강한 백합은 장례식장에서는 환영받지만 실내에 들여 놓기에는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아마릴리스란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양치기 소녀에서 유래합니다. 이 꽃의 꽃말은 오만과 자랑이지만, 수줍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콧대가 높은 것과 수줍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자연은 공평합니다. 화려한 꽃에게 좋은 향기까지 주는 일은 드물죠.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는 데는 외모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고 눈길이 덜 가는 꽃이 향기가 좋습니다. 대체로 흰 꽃이 색채가 있는 꽃보다 향기가 더 좋습니다. 향기가 좋은 찔레, 치자, 인동, 옥잠화, 은방울꽃, 아카시아는 모두 꽃이 하얗스비다. 대체로 남성은 아마릴리스, 백합, 모란, 작약처럼 크고 탐스러운 꽃을 좋아합니다. 반면 여성은 라일락, 안개꽃, 물망초처럼 꽃이 작으면서 분위기가 좋은 꽃을 좋아합니다. 남성들의 용모지상주의는 꽃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작약은 억울합니다. 모란과는 서로 사촌 간인데 모란은 시인들의 꽃이고 작약이란 이름은 한약재상의 취급품목처럼 들립니다. 모란은 나무로 대우를 받는데 작약은 풀로 쳐 준다. 중국인들은 모란을 꽃 중의 왕(花王)으로 치켜세우면서 작약에게는 그보다 한 등급 낮은 꽃 중의 재상(花相)의 칭호를 주었습니다. 


어느 5월 초 모란의 시인 김영랑의 생가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마당에 핀 모란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꽃은 이미 다 져버린 후였습니다. 그곳의 모란은 4월 25일 전후가 절정이라고 합니다. 모란은 꽃피는 기간이 무척 짧습니다. 꽃이 피는가 하면 어느 틈에 져 버리는 것, 이것이 모란의 야속함입니다. 


모란과 작약은 향기를 위해 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향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작약 품종 중에는 향기가 좋아 신부의 부케로 쓰이는 것도 있습니다. 신라 선덕여왕이 모란도를 보고 ‘나비가 없는 것을 보니 이 꽃에는 향기가 없겠다’고 하여 그 총명함을 보여주었다는 말을 너무 고지식하게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인들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작약을 끔찍이 좋아합니다. 봄철 꽃시장에도 중국에서 수입한 화려한 개량종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꽃의 품격으로는 홑꽃의 재래종, 그것도 흰색 꽃이 으뜸입니다. 백의민족인 우리의 정서를 잘 드러내기 때문이겠지요.





출처 : 사외보 아주좋은날 2015. 봄호


PICTORIALISM OF FRAGRANCE 하게 표현된 세밀화를 통해 그 속에 담긴 꽃의 향기를 이야기해 봅니다.

글 : 신우재


신우재는 한국일보 기자, 문화방송 기획부장을 거쳐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강의, 기고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면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