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계적인 천재의 이유 있는 '이중생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계적인 천재의 이유 있는 '이중생활'
화가, 발명가, 음악가, 해부학자, 과학자, 철학자, 건축가…….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모두 열거하자면 그야말로 끝이 없는 이력의 소유자. 과연 이렇게 많은 수식어를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요? 영국 과학 전문지 <네이처>가 뽑은 인류 역사를 바꾼 세계 10대 천재 중 1위,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일컫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수식어 중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요리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요리사였다니? 과연 세기를 초월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천재의 미각이란 어떤 것일까요?
요리사가 그린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대표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은 약 3년에 걸쳐 완성된 세기의 명작입니다. 예수와 열두 제자의 얼굴을 생생히 그리기 위해 실제 모델을 찾았다는 에피소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덕분에 제작 기간도 길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혀 다른 반론이 존재합니다. 그 논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가 실제로 그림을 그린 기간은 겨우 석 달, 남은 시간은 오로지 <최후의 만찬> 식탁에 오를 음식들을 선정하기 위해 만들어 맛을 보느라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일부에서는 꽤 설득력 있게 통하고 있고, 숨겨진 그의 기록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진실일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19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레미타즈 박물관에서 오래된 노트 한 권이 발견됐습니다. 이름 하여 <코덱스 로마노프(Codex Romanoff)>. 19세기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가에서 구입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놀랍게도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 노트였습니다. 로마노프 왕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과 함께 구입한 노트로 여기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의 요리 레시피를 비롯, 식사예절과 식이요법,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엌, 또 각종 희귀한 조리기구 설계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노트는 세상에 파란을 일으켰고 '요리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연구가 줄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다빈치 전문가로 알려진 조나단 라우쓰(Jonathan Routh)는 심지어 그의 원래 직업을 요리사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논리를 부인하기 어려운 증거들이 이후에도 속속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30년 동안 이탈리아 스포르자 궁전의 연회 담당자로 일했고, '세 마리 달팽이'라는 술집에서 주방장을 맡았으며 직접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의 세 마리 개구리 깃발'이라는 술집을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식당 이름에서도 짐작되듯 그의 요리관은 지나치게 독특했고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레오나르도는 요리를 그만두고 요리와 관련된 발명품을 만드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포크라고 부르는, 음식을 찍어 먹을 수 있는 삼지창 형태의 식사도구를 비롯해 스파게티 면을 뽑는 기계, 후추 가는 도구, 와인 오프너, 자동 고기구이 등이 그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 요리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중적이고 비밀스런 식도락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유명한 공증인 세르 피에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는 새로운 의붓아버지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의붓아버지의 직업이 과자 제주업자였던 것이죠. 새 의붓아버지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단맛을 실컷 맛보게 해주었고, 덕분에 그는 일찌감치 미각에 눈떴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성인이 된 레오나르도는 수십 년 동안 요리와 연회의 세계에 흠뻑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미각의 세계에 빠져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음식은 화려한 장식과 과도한 양념을 절제하고 재료 본연의 맛에 충실한 요리였습니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것은 1970년대 이후 불기 시작한 새로운 요리 사조인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과 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표 건강식으로 통하는 지중해 식단과도 꼭 닮아 있습니다. 과일, 채소, 빵, 곡물, 감자, 콩, 견과류, 씨앗 등을 다량 섭취하는 반면 붉은 고기는 되도록 먹지 않고 포도주는 소량이나 적정량 마시는 것. 더욱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채식주의자였습니다. 샐러드, 과일, 채소, 면 등을 즐겨 먹었고 특히 쌀과 야채로 걸쭉하게 만든 수프를 좋아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만의 건강관리 규칙을 쪽지에 적어 놓기도 했는데, 식탁을 떠나자마자 서 있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바로 잠들지 마라, 술은 절제할 것이며 자주 마시되 적게 마시고 화장실에 가는 일을 미루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때는 부유층들이 기름진 금식과 과하게 진수성찬을 즐기던 시절. 음식에 대한 관심과 일찍이 발굴된 미각, 또 충분히 상류사회에 속해 식도락을 누릴 수 있던 위치에 있었음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절제했습니다.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나친 완벽주의자
레오나르도가 어렸을 때 데생에 소질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유명한 화가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다른 견습생들이 그렇듯 그 역시 처음에는 바닥 청소나 잔심부름, 붓을 닦는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우연히 스승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겨우 스승이 그리다가 만 그림 귀퉁이에 천사들을 그려 넣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승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충격에 빠졌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제자의 재능에 감탄해 이후 그림을 포기하고 조각에만 전념하게 됩니다.
이 한 에피소드만으로도 알 수 있듯 레오나르도, 그는 말 그대로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난 천재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나보다 앞선 사람들이 필요한 주제를 전부 다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잔치에 늦게 온 가난뱅이가 할 수 있는 일뿐이다"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 반성은 완벽주의로 이어졌습니다. 더 완벽한 작품을 그리기 위해 그는 고치고 고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손을 놓아버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이 미완성이고, 완성된 작품도 많아야 스무 점이 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명작 <모나리자>가 미완으로 남은 것 또한 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레오나르도가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부족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자기를 단련하는 과도한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람, 자신에게 아주 엄격하고 깐깐한 사람으로 알려진 레오나르도는 항상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했고 음주와 음담패설을 아주 싫어했으며,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붉은 고기를 거의 먹지 않고 채소를 다량 섭취했으며 포도주도 적절히 마셨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수많은 노트 중 하나에 그려진 복잡한 도식 끝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기타 등등, 스프가 식기 때문에……"
그는 타고난 천재로서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때론 그저 스프가 식는다는 소박함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던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중 하나가 <라 지오콘다(La Gioconda)>, 즉 <명랑한(또는 농담하는) 여인>으로 불렸던 것처럼 가벼운 농담으로 사람을 웃게 만들기 좋아하면서도 평소 냉담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살았던 괴짜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요리 도구와 레시피를 발명해낼 만큼 요리를 사랑했음에도 채식주의를 고집했던 이중 인격자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이 몯느 것이 오직 한 완벽한 천재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표현이었음을 말이죠.
출처 : 웹진 Pioneer 142호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