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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2. 15:00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한신의 '배수진(背水陣)'은 상식을 뒤엎는 발상에서 비롯됐습니다. 한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말(馬)은 죽여버려야 한다는 의견과 달리, 오히려 그것을 길들여 천하의 명마로 삼았던 항우의 혜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질적인 사고. 그 중 99개는 미친 생각이더라도 한 가지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있어 페이스북과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 남다른 생각에 우리는 좀 더 관대한 태도로 소통을 시도해 봄직하지 않을까요?!




다름, 어디까지 인정해봤나?





김조광수 영화감독의 동성 결혼 발표나 전 검찰총장의 혼외 자녀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에서 잘 드러나듯, 현대인들은 대체로 동성애가 아닌 이성애, 다처제가 아닌 일부일처제 등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독특한 문화는 비정상적이고 옳지 못한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동일한 사고방식이 강한 곳에서는 그 성향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역사학과 문화인류학에 따르면 이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도 동성애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을 가능성도 아주 높습니다(플라톤의 저서 <향연>에는 소크라테스가 당대 최고의 꽃미남 장군이었던 알키비우스를 열렬히 사랑했던 것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게다가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에 보편적이었던 결혼 제도는 일부일처제도 일부다처제도 아닌 군혼(群婚), 즉 다부다처제였습니다.


진문공(晉文公, 진나라의 22대 군주)에게 허벅지 살을 제공했다는 개자추(介子推, 문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 아버지 헌공에게 추방되었을 때 19년 동안 그를 모시며 같이 망명생활을 함)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한식의 유래나 유비가 여포에게 패한 후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던 중 한 촌부의 집에 들렀을 때 대접할 음식이 마땅치 않았던 촌부가 아내를 죽여 식탁에 내놓았다는 일화 등을 통해 고대 동양에서도 인육을 먹는 것이 그렇게 혐오할 만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면 다소 충격적인 동시에 조금은 관대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500년도 더 이전에 살았던 천재적인 사상가 장자는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이라는 말이 원래는 시피(是彼), 즉 '이것과 저것'에서 유래되었다고 간파한 바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이란 영어의 'this'와 'that'처럼 주어에 가까운 대상과 다소 멀리 떨어진 대상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자신에게 가까운 것을 정상적이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가 그른 것,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대체로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 생소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수학폐쇄적 역사, 닫혀버린 사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현대 동양인들이 너무나 당연시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서구 사회가 동양 사회보다 선진적이고 우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문화와 경제, 군사 등 제 분야에서 동양이 서양보다 앞서 있었음을 쉽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4대 발명품이 동양에서 발명되어 서양에 전파 되었음은 물론 항해술에서도 명나라의 정화가 콜럼버스보다 90여 년이나 앞서 7배 이상 큰 배를 이용해 더 먼 지역을 7차례나 거쳐 탐험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공자학자 크릴(H.G Creel)은 <논어>와 같은 동양 사상서들이 계몽주의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이 역전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서양과 동양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중세 암흑기 이후 서양은 계속해서 '비정상적인' 사고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의 권위는 무너졌고 갈릴레오와 뉴턴, 다윈 등에 의해 신의 권위 자체가 도전을 받게 됩니다. 마그나 카르타에 의해 왕과 귀족의 관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왕정이 붕괴되고 만인평등주의가 득세하는 한편 미국의 독립전쟁을 통해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역전되었고 남북전쟁을 통해 모든 차별의 철폐를 향한 초석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전들은 당시 사회 구조를 당연시하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이고 미친듯한 사고에 불과했겠지만, 그러한 도전에 끊임없이 직면하면서 점차 탈 형이상학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로 변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동양은 제자백가로 대표되던 지적 다양성의 생기를 점차 잃고 점점 더 형이상학적이고 폐쇄적이며 독단적인 사상이 지배하게 됩니다. 사회의 변화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지배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만한 새로운 생각의 도전은 없었습니다. 왕조가 변화해도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는 그대로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생각들은 표현될 수조차 없었으니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한 도전적인 지위를 가질 수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선 사회입니다.



개국 초기 세계적인 문화 수준을 자랑하던 조선은 강제 개항에 이르기까지 '조용한 아침의 나라'답게 큰 변화라곤 거의 겪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배 이념이었던 주자학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표현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목숨까지 가차 없이 앗아갔으니 다양성과 개방성이 자리 잡을 틈이 없었고, 결국 정체된 모습 그대로 식민지의 운명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이질적인 서양의 문명에 접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이 아시아 최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한 것과는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오답'도 '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서구의 개방 사회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과감한 사고와 발언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른바 오답을 말하더라도 "어머, 너는 어떻게 그렇게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니?"라고 먼저 대화를 시작해 주는 교육 분위기 탓일 것입니다. 그런 상황 하에서 학생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교육 과정에 참여하고 자발적인 동기 부여를 통해 대기만성형의 창의적 인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 2000년 커밍아웃을 선언한 뒤 대한민국이 홍석천 씨의 '다름'을 인정하기까지는 13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국 사회도 조금씩 변하고 있긴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앙드레 김이나 홍석천과 같이 독특한 선구자가 그나마 다양화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들의 다름을 보며 다름을 인정하며 그와 유사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가능해지게 되었고, 사회는 좀 더 개방적이고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도전적인 사고를 통해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독단의 족쇄를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 획일적이고 독단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정장을 고수하고 회사 밖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필자가 가르친 학생들이 로스쿨 면접에 가면 그곳이 장례식장인지 헷갈릴 정도라고 합니다. 타인의 다른 의견에 "어머!"를 외칠 수 있는 관대함만이 창의적 사고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웹진 Pioneer 142호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