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라이벌, 페라리 VS 람보르기니
세기의 라이벌, 페라리 VS 람보르기니
슈퍼 카(Super car)란 최고속력 시속 300㎞ 이상, 제로백 4초대 이하, 최고출력 400마력 이상에 해당하는 고성능 차량을 의미합니다. 슈퍼 카들은 일반적으로 스포츠카의 형태를 지니고 차체에 비해 큰 배기량을 가지고 있는데요, 대량생산도 하지 않고 가격도 무시하면서 오로지 높은 주행 성능을 중시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슈퍼 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일종의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두 브랜드가 있으니 바로 페라리와 람보르기니인데요, 이들은 강렬한 성능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모든 스포츠카를 압도하는 슈퍼 카의 양대 산맥이자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흥미진진한 자동차에 관련된 사연을 소개해드릴까 하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페라리와 람보르기니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스피드에 목숨을 걸었던 엔초 페라리
<엔초 페라리 (출처 : 위키피디아)>
페라리(Ferrari)는 이탈리아의 스포츠카 제조업체로 1929년 엔초 페라리(Enzo Ferrari)가 설립했습니다. 페라리의 창립자인 엔초 페라리는 1898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모데나(Modena)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처음으로 자동차 레이스를 구경한 후 자동차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열세 살이 되자 엔초 페라리는 이탈리아의 공업 도시인 토리노(Torino)에서 테스트 드라이버로 일하며 자동차 기술을 습득했고 1919년 레이스에 출전하면서 드라이버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4년, 코파 아체르보(Coppa Acerbo, F1 페스카라 그랑프리로 개명)에 출전해 독일의 벤츠 SSK(Benz SSK)를 제압하며 최고의 레이서로 주목받으며 이후 알파 로메오(Alfa Romeo)의 레이서로 활동하게 됩니다. 페라리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29년에 자신이 직접 F1 레이싱 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라는 팀을 창설하였고, 이것이 페라리의 전신입니다.
<페라리의 엠블럼 (출처 : http://stocklogos.com/)>
페라리의 엠블럼에서 볼 수 있는 'SF'는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것인데요, 엔초 페라리는 레이스에 참가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아들 알프레도가 테어난 1932년까지만 활약하고 그만두었습니다.
페라리의 엠블럼에 그려진 말 그림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얽혀 있는데요, 때는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엔초 페라리는 라벤나(Ravenna)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파올리나 백작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백작부인의 아들 프란체스코 백작은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공군 파일럿이자 1차 세계대전의 국가적인 영웅이었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프란체스코 백작이 전투기 옆면에 말을 그려 넣곤 했는데 이 그림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며 엔초 페라리의 차량에도 말 그림을 그려 넣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프란체스코 백작의 비행기에는 흰 바탕에 붉은색 말이 그려졌지만 페라리는 자신의 고향 모데나 시의 상징색인 노란 바탕에 검은 말을 차량에 그려 넣었습니다. 이렇게 SF와 검은 말은 페라리의 심벌이 됩니다.
<Tipo 815 (출처 : 위키피디아)>
한편, 1939년 알파가 자신의 레이싱팀인 스쿠데리아를 흡수하고 자신을 내쫓으려는 의도를 알아챈 페라리는 알파와 결별하고 이후 자동차를 설계·생산하기 위해 모데나에 지금의 페라리 공장을 만들었고 1940년 티포 815(Tipo 815)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페라리라는 브랜드의 시작이 됩니다.
<Tipo 125S (출처 : 위키피디아)>
그리고 1947년에는 최초로 페라리라는 이름을 달고 도로 운행이 허가된 차량인 티포 125S가 처음으로 생산되었습니다. 페라리는 처음에는 스쿠데리아의 자금 조달을 위해 마지못해 차를 생산했지만 그의 자동차들은 스포츠카 레이싱 경기인 F1에 지속적으로 출전하면서 뛰어난 성능으로 곧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1951년 F1에서 우승을 거둔 페라리의 슈퍼 카 (출처 : http://formula1.ferrari.com/)>
엔초 페라리는 당시 모든 차량 개발의 최우선 조선을 최고 시속 달성에 두고 오로지 경주에서 우승하는 데 몰입했다고 합니다. 결국 1951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페라리는 당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던 알파 로메오의 레이싱 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56년은 엔초 페라리에게 있어 매우 불운한 해였는데요,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아들 알프레도가 24살이란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 이후, 페라리는 공장에서 생활하며 자동차 개발에만 매진했고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후에 나온 자신의 모든 6기통 엔진 차종에 알프레도의 별명인 '디노(Dino)'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힘들고 가슴 아픈 시기를 겪었지만 엔초 페라리가 만든 자동차는 뛰어난 성능과 그랑프리 연속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전설의 슈퍼 카로 자리매김합니다. 이처럼 페라리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엔초 페라리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 업체인 피아트(Fiat)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로 인해 페라리는 1969년에 50% 지분을 피아트에 넘겨준 뒤 피아트 그룹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1988년 엔초 페라리 사망 이후 페라리는 90%의 지분을 피아트에 넘기면서 피아트의 계열사로 편입되었습니다. 하지만 피아트와는 별도의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엔초 페라리의 독설에서 탄생한 람보르기니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출처 : 위키피디아)>
람보르기니는 1963년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가 설립한 이탈리아의 스포츠카 제조회사입니다. 람보르기니의 역사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데요, 페루치오의 초고 성능 슈퍼 카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이뤄낸 결과가 바로 람보르기니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1916년 4월 28일 이탈리아의 페라라(Rerrara)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엔진 기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기계 공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로데스(Rhodes)에서 이탈리아군의 차량 사령부에서 정비사로 근무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농업기계로 변환되었던 군 차량들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3년 직후인 1949년부터 람보르기니 트랙터 공장에서 자신의 트랙터들을 설계·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트랙터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는데 '절대로 고장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람보르기니의 트랙터 공장은 견인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면서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며 나날이 번창했습니다.
<람보르기니 dl30 트랙터 (출처 : http://www.myclassicuk.com/)>
어릴 적부터 자동차를 좋아했던 람보르기니는 트랙터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얻으면서 취미로 이름 높은 자동차를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는 페라리의 슈퍼 카 250 GT도 있었는데요, 당시 페라리는 클러치 결함으로 오명이 자자했습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러한 페라리의 클러치 고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알려주기 위해 페라리의 제작자인 엔초 페라리와의 대면을 원했다고 합니다. 같은 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엔지니어로서의 호의를 기대하고 엔초 페라리와의 접촉을 시도한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합니다.
람보르기니와 페라리의 만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요 둘이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엔초 페라리는 람보르기니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트랙터나 더 많이 만들어라'라며 큰 모욕을 줬다고 합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당시 큰 성공을 거두던 트랙터 제조에서 슈퍼 카 제작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 정확한 연유를 아는 사람은 없지만, 대부분 사람은 엔초 페라리와의 사건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후 람보르기니는 1963년 볼로냐에서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알파 로메오 등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자동차 제조업체의 엔지니어들과 디자이너들을 고용해서 페라리에 복수하리라 다짐합니다. 페라리와 앙숙 관계에 있던 알파 로메오의 기술자들을 영입하는 데 모자라 이때 람보르기니의 제1 사칙이 정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조건 페라리보다 빠른 자동차"였다고 하니 페라리에 대한 람보르기니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죠.
<람보르기니 350GT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람보르기니는 1964년에 첫 모델인 350GT를 출시했습니다. 350GT의 V12 엔진은, 최상의 상태에서 매우 높은 힘을 낼 수 있도록 고안돼서 세 자리의 속도를 넘나들 수 있던 엔진이었는데 이는 페라리의 슈퍼 카를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를 창립한지 겨우 1년 만에 페라리를 앞지른 자동차를 생산한 것입니다.
<1966 람보르기니 miura (출처 : http://www.scorpiocars.net/)>
2년 뒤인 1966년에는 공공도로에서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 최초로 미드십 엔진 섀시를 채택한 람보르기니 미우라를 출시했습니다. 이 차는 6.2초 만에 100km/h에 이르며 최고 속도가 약 280km/h로 당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카였습니다. 1974년에 생산된 카운타크(Countach)는 최고 시속이 300km/h에 이르며, 지상 최고의 스포츠 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이후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페루치오는 1972년 회사를 매각했고, 여러 번 소유주가 바뀐 끝에 람보르기니는 1998년 폭스바겐의 자회사인 아우디에서 인수했습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생전에 "엔초 페라리가 90세까지 살았으니 나는 91세까지 살아 페라리를 이기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악연인지 인연인지, 이 길고 긴 경쟁을 죽는 그 순간까지 이어가겠다고 말해왔던 그이지만, 결국 이 부분에서는 페라리를 이기지는 못 했습니다. 람보르기니는 엔초 페라리가 숨을 거둔 5년 후, 1993년 2월 20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람보르기니의 엠블럼 (출처 : http://hdw.eweb4.com/)>
람보르기니의 엠블럼은 투우 모양인데 이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태어난 때의 별자리가 황소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인이 황소자리를 타고난 것도 있지만 람보르기니는 자동차 이름에 투우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가야르도, 레벤톤, 무르시엘라고, 우라칸 등 람보르기니의 다수 차종의 이름은 투우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태어난 성좌(星座)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준다고 믿고 있는데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타고난 황소자리는 총명하고 충동적이며 의지가 굳은 자의 성좌라 합니다. 이렇듯 그의 일생을 보면 황소자리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페라리에 대한 경쟁과 오기로 슈퍼 카 생산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오늘날 람보르기니를 슈퍼 카의 대명사로 자리하게 만든 페루치오의 끈기와 집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속도 그 자체에 미쳐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를 만들고자 했던 엔초 페라리와 그를 뛰어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최고의 명차를 무수히 생산한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의 이름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대명사로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