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바다, 바람이 키운 섬 거제도
하늘, 바다, 바람이 키운 섬 거제도
사람들을 퍽 좋아해도 무리로부터 벗어나 때로 섬이 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섬이 그리울 때는 섬으로 떠나야 합니다. 거제도는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으로 60여 개의 섬을 알처럼 품고 있습니다. 다른 작은 섬으로 건너가기 위한 선착장이 있는 항구가 거제도 해안가를 따라 곳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부산과 거제를 잇는 8.2km의 거가대교를 건너 우리는 거제도의 구조라항에 닿았습니다. 그 어느 날보다 초가을 하늘이 드높았고 볕은 따가웠습니다.
그 섬이 우리를 부를 때
남자들에게 의리라는 게 있다면 여자들 사이에는 자매애라는 게 있습니다. 섬으로 따지자면 바로 이웃하여 있어 늘 서로 마주하는 거리에 있는 사이. 아주캐피탈 최윤정 매니저와 그녀의 친구 김현정 씨는 대학교 때부터 지금껏 많은 것을 함께 나누어 왔습니다. 여행, 취미생활, 희망과 꿈, 기쁨과 슬픔, 그리고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기억으로 기록되어 그들 각자의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한껏 들떴습니다. 보고팠던 바다와 섬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 말입니다. 구조라 유람선 터미널에서 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자니, 얼룩덜룩한 마음의 군더더기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는 기분입니다. 머리도 가슴도 시원해집니다. 윤정 씨와 현정 씨는 별 이야기도 아닌 것에 ‘하하하’ 큰 웃음을 연신 날리고, 그 웃음소리를 파도가 삼킵니다.
외도 보타니아는 ‘바다 위의 정원’이라 부를 만큼 섬 전체가 진귀한 식물과 조형물로 잘 다듬어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거제시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는 외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도와 서도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동도는 자연 상태 그대로 동백 숲이 섬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생명을 품은 공간과 사람의 손길로 가꾸어진 공간이 공존하는 셈입니다. 우리 내면에 야성과 문명의 모습이 함께 똬리 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 섬에 애착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입구부터 천천히 거닐며 선인장 동산을 지나다 보면, 이어 프랑스식 정원으로 가꾸어진 비너스가든이 나옵니다. 탁 트인 바다 전망을 앞에 두고 널찍하게 펼쳐진 정원 한가운데 서 있자니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올 수밖에……. “이곳이 우리 집이었으면!” 윤정 씨의 마음이 곧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비너스가든 앞 리스하우스는 관광객들이 외도에서 사진 촬영을 가장 많이 하는 장소로 꼽힙니다.
두 남녀가 사랑의 결실을 맺었던 드라마 <겨울연가>의 마지막 촬영지이기도 해서일까요? 커플들이 그 장소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꼭 그 장소를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한 소중한 한 컷. 어찌 보면 다 거기에서 거기인 비슷한 한 컷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진 안에 담긴 사랑 이야기만큼은 각기 다르지 않을까요.
윤정 씨와 현정 씨 또한 셀카봉을 활용하여 리스하우스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렇게 또 한순간이 ‘찰칵!’ 꽃들이 뒤덮인 전망대로 가는 길과 이어진 대죽로는 손을 잡고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습니다. 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대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동섬 주변 정경이 들어옵니다. 내 안에 있는 야성성의 반쪽을 바라보듯 그곳에 잠시 멈춰 서 눈길을 머물게 하는 건 어떨까요. 자연 그대로도 아름답습니다.
바닷바람 타고, 춤
외도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척박한 바위섬이었습니다. 이곳을 30년 동안 공들여 가꾼 부부가 있습니다. 이창호, 최호숙 씨 부부. 2003년 별세한 이창호 씨는 1969년 바다낚시를 갔다가 풍랑을 피해 우연히 외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밀감 농장, 돼지 사육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정성을 쏟아 1,000여 종에 이르는 식물 관광농원으로 가꾸었습니다. 한겨울에도 초록 잎사귀를 자랑하는 야자수가 푸른 바다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곳. 선샤인, 야자수, 선인장 등의 아열대 식물이 가득하고, 스파리티움, 마호니아 등의 희귀 식물을 볼 수 있으며,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동백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섬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우리를 유혹합니다. 해금강의 절경이 보이는 전망대에서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마시고 내려오니 해가 뉘엿뉘엿 질 참입니다. 그제야 오후 내내 사람들로 붐볐던 이 섬에 고요가 깃들고, 텅 빈 비너스가든 앞 음악당에서는 장엄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집니다. 두 사람은 음악당 계단을 사뿐히 올라 해질 무렵의 탁 트인 바다와 하늘을 바라봅니다. 잠자고 있던 에너지가 깨어나 약동하며 손끝 발끝까지 차오르는 느낌, 두 사람은 통했던 걸까요? 윤정 씨가 한 쪽 다리를 학처럼 들어 올리더니 온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팔을 우아하게 뻗어 발레 동작을 선보입니다. 현정 씨도 함께 합니다.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두 사람의 이미지는 비너스 상의 실루엣과 묘하게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긴장감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라는 생생한 느낌말이죠.
파도 소리 그리고 별 하나
그날 묵었던 곳은 해금강이 바라보이는 바다 앞 작은 펜션이었습니다. 펜션 정원에 들어서니 파도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밤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정원에서 밤 깊은 줄 모르고 수다를 이어갔습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보던 윤정 씨가 “요즘 과학 관련 책을 읽고 있는데 재미도 있지만 자연의 이치를 알게 되니 마음이 편안해져요.”라고 말문을 틉니다. 우주론자 마틴 리스는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시구처럼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이 문장은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습니다. 별이 일생을 마감할 때 초신성 폭발이 일어나는데, 그때 흩어져 나온 원소들이 뭉쳐서 행성이 만들어지고 다시 그 행성들에서 생명체가 생겨난다고 하니,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 아닐까요. 그럼 우리는 모두 먼지 동무이련가요.
“고향 포항을 떠나 대학교 때부터 서울 생활을 했거든요. 서울 토박이 현정이가 있어 늘 힘이 됐어요. 지금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고, 일주일에 한 번 퇴근하고 발레도 함께 배워요.”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두 사람은 친구 이상 자매 같은 사이입니다. 곁을 지켜 준 서로가 오늘따라 더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이곳이 특별한 여행지여서 일까요. 두 개의 큰 바위섬이 서로 맞닿고 있어 금강산의 해금강을 연상케 해서 붙여진 이름, 해금강이 날이 밝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해금강의 아름다움과 한국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된 조선소의 장관으로 기억되는 거제도는 한국 현대사의 가슴 아픈 상처를 껴안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과 전쟁 포로가 수용되었던 거제포로수용소가 바로 그 상처의 흔적입니다. 해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바람의 언덕 정상에서 윤정 씨와 현정 씨는 크게 양팔을 벌려 바람의 저항에 맞섭니다. ‘그래, 바람, 불 테면 불어라! 온몸으로 힘껏 맞아주마!’ 마치 과거의 모든 상처를 껴안기라도 하듯이.
출처 : 사외보 아주좋은날 2014.09+10월호
NATURE & ART 과 예술이 어우러진 특별한 여행 이야기입니다.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