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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들, 친구와 영웅 사이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9. 22. 13:22

아빠와 아들, 친구와 영웅 사이



  

인간은 언제까지 성장하고 언제부터 늙어가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신체의 성장과 노화는 25세를 전후해서 갈림길에 들어선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성장과 노화의 단계를 확연히 구분 짓기 어렵습니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많은 일들을 얼마나 의미 있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죽을 때까지 성장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신체의 노화야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나이가 좀 들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외모에서 드러나는 노화의 흔적들을 지우기 바쁩니다. 어느 날 삐죽 솟아난 흰머리를 족집게로 뽑기 시작해서 염색으로 검게 숨기기까지 우리는 자주 노화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몸이 늙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더 이상 마음이 자라지 않는 것인데도 말이죠. 심적 성숙이 시련과 인내, 연단과 통찰 등의 덕목을 필요로 한다면, 육아(育兒)야말로 인간을 성숙시키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상적인 계획이나 석학의 이론과는 거리가 먼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자녀를 낳는다고 아이들이 저절로 크지 않는 것처럼, 애를 키우면서 부모도 성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계기를 통해서 모두가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에게만 성취의 기회가 오는 것처럼 말이죠.




슈퍼맨이거나 스승이거나 동지  





순하디 순한 필자의 동료 교수가 식사 중에 요즘 자신의 아내가 중학생인 딸아이와 매일 싸운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뭐 그리 뾰족한 해법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그냥 아들 데리고 집을 나선다고. 


엄마와 딸에게 전쟁터를 내어주고 집 앞 놀이터를 배회하는 부자의 모습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떠올린 그림 속에서 그 아빠와 아들은 서로 난민 동지였습니다. 제 남동생은 14년 전 아들을 낳았을 때 게임 실력을 더 연마해야겠다는 황당한 발언으로 온 가족을 놀라게 했습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더 좋은 양육환경을 만들어주겠다든지, 육아와 가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컴퓨터 오락을 열심히 연습해서 나중에 아들이 사춘기가 되었을 때도 자신을 존경하며 우러러 보게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요즘 가족모임에서 간혹 조용히 머리를 맞대고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는 동생과 조카 녀석을 보고 있자면, 그 포부가 헛되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둘은 스승과 제자입니다. 


요즘 주말 공중파 방송은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들이 점령했습니다. 엄마 없이 아이들을 돌보는 아빠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처음엔 신선했더랍니다. 연예인 아빠들이 그 동안 쌓아온 방송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로지 애 키우는 아빠로서의 생고생이 화면을 채웠습니다. 아이들은 울거나 보채거나 먹거나 말썽 피우거나 하다가 아주 가끔 귀엽게 웃습니다. 시청자 입장에서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장면이나 시간에 대해서 상상해 보기가 유쾌하진 않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는 그 시간 동안 텔레비전 속 아빠들은 진짜 슈퍼맨입니다. 


아빠들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허구로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사입니다. 아들에게 아빠는 슈퍼맨이거나 스승이거나 동지입니다. 이 모든 역할을 처음부터 잘할 순 없습니다. 오래 전 제 어머니는 내게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맏이인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 다 최선을 다해서 부모 역할을 하겠다는 의욕에 불탔으나 경험은 전혀 없는 초보 부모였습니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노력했지만 지나고 보니 끝없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 큰 딸인 내게 미안하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 삼남매를 키우면서 막내가 초등학교 갈 때쯤이 되자 비로소 양육은 성취가 아니라 과정의 기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도 하셨습니다. 사실 처음엔 그 말뜻을 잘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이젠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좋은 부모’는 ‘성숙한 인간’의 충분조건이 된다고 믿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과제를 정말 잘해낼 수 있습니다. 부모의 지나친 의욕은 아이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에 비해 부모가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아이는 저절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아들과 친구이면서 영웅을 꿈꾸는 아빠  





식구들을 해외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된 친구는 밤마다 아이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씁니다. 그날 있었던 일, 지금 읽고 있는 책, 다음 날의 계획 등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일기가 되어버린 글을 이메일로 보내고 나서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다고 합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매일 그 편지를 받는 아들들의 반응이 궁금했습니다. ‘과연 아이들은 아빠의 마음을 알까? 혹시 성가셔하진 않을까?’ 차마 묻지 못했던 것은 친구의 얼굴에도 확신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휴가에서 돌아온 친구가 큰 맘 먹고 아이들과 함께 다녀온 여행에서 고등학생 두 아들이 자신을 따돌리더라며 서운해했습니다. 


아빠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아빠를 부담스러워했던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부성의 권위는 더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아빠가 아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축적된 지식을 넘겨줌으로써 전수자와 후계자의 관계 속에서 권력을 확보해온 과거의 질서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농경사회가 아닌 무한경쟁시대를 사는 아빠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 또는 유지시키는 일만으로도 항상 벅찼습니다. 언제 경제활동 장면에서 퇴출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점점 더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아빠들은 시간이 갈수록 할 말이 없어지고 아이들은 아빠의 고통에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아빠가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남자아이들은 자라면서 한 번쯤 영웅이 되고 싶어 합니다. 배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 각종 ‘맨 시리즈’를 섭렵하면서 자신을 그들의 모습에 투영시키는 꿈을 꾸죠. 적어도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는 동안 모든 남성은 행복합니다. 엄마들은 경쟁을 통해서 규율을 익히고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아들을 이해하기도 힘들고 감당하기도 어려워서 어떻게든 틀 안에 잡아 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아빠는 다릅니다. 


아직 소년의 마음을 품고 있는 아빠는 아들의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아들에게 잔혹한 현실의 면모를 일깨워주기보다는 함께 놀면서 공상하는 시간을 보내면 됩니다. 아빠는 아들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아빠에게 이러한 과제는 전혀 힘들 것이 없습니다. 성인 남성인 아빠의 가슴속에도 아직 영웅은 살아있을 테니까 말이죠.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아니더라도 현실 속에서 명예와 책임, 정의와 박애를 꿈꾸는 사람, 아들과 친구가 되어 영웅을 꿈꾸는 아빠야말로, 스스로를 한층 더 성장시킬 수 있고, 언젠가 아들의 마음속에 진정한 영웅으로 남을 것입니다.






출처 : 사외보 아주좋은날 2014.09+10월호 



OUR PLAY CULTURE 아빠와 아들 사이의 놀이문화를 이야기합니다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