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보는 심리학, "정말로 아는 것이 힘일까?"
재미로 보는 심리학, "정말로 아는 것이 힘일까?"
요즘 부쩍 식욕도 없소 소화도 안 되고 기력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디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웬걸, 암 초기 증상과 비슷합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몸무게도 준 것 같네요! 그렇다면 내가 정말 암?! 절망스런 마음에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니 병명은 스트레스성 소화불량이랍니다.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롤러코스터를 탔지만, 이번엔 이 의사를 믿어도 될지 의심이 됩니다. 이런 당신에게 내려진 전문가의 진단은 일명 "아는 게 병", 너무 많이 알아 생긴 건강 염려증입니다. 아는 게 병이라고? 설마! 그 도통한 영국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자기 묘비에도 떡 하니 써 놓은 명언이 분명 "아는 것이 힘이다"이거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는 건 분명 힘이 아니던가요??
"너무 많이 알면 다쳐"
(출처 : 네이버 영화)
얼굴만 보고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훤히 꿰뚫는 천재 관상가 내경(송강호 분)은 기행 연홍(김혜수 분)의 제안으로 한양에 입성합니다. 다음날부터 그의 거침없는 활약이 시작되고 순식간에 한양 바닥에는 특급 점쟁이가 떴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때 그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김종서 장군의 사람.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하려는 수양대군의 역모를 막기 위해 내경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내경은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고 수양대군의 얼굴에서 제대로 역모의 단서를 읽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영화 <관상>의 결말은 잘 알고 있듯 내경의 참패입니다. 심지어 내경은 이 과정에서 아들을 잃고, 그의 처남도 목소리를 잃고 맙니다. 영화 말미에 수양대군(이성재 분)이 내경을 두고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양반은 알았을까? 이리될 줄을……."
베이컨의 명언 '아는 게 힘이다'만 보면 분명히 이 게임은 내경의 도움을 얻은 김종서 장군의 승리로 끝났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경에게 많이 안다는 것은 오히려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반면 수양대군은 내경에 비해 정보는 부족했어도 빠른 판단과 수완 좋은 용병술로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결말을 미리 알았든 아니든 그 정보는 이미 내경에게 힘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경에겐 그야말로 남들보다 많이 아는 게 힘이 아니라 병이고 자초한 화였으니 말이죠.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전문가'인데
저명한 학자와 기업가, 유력한 정치인들이 결성한 국제적인 비영리 연구기관인 로마클럽(Club of Roma)은 70년대 초에 현재의 상태로 계속 석유를 소비하면 2000년대 초반에는 지구 상의 석유가 모두 고갈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예일대의 폴 케네디 교수는 80년대 후반 "머지않아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요? 석유 생산량은 여전히 건재하고 일본을 대신해 미국을 위협하는 2인자로 등극한 것은 중국입니다. 사실 그 분야의 프로,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그들의 예측이 빗나가고 번복되는 일은 종종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원인을 지식착각(Illusion of knowledge) 때문으로 봅니다. 지식착각이란 자신의 지식이나 정보를 지나치게 믿어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제공되는 정보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사를 결정하는 정확성도 높아진다고 믿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과신하게 되며 이 과신이 결국 합리적인 판단을 흐려 정확한 결정을 방해한다는 이이갸입니다. 정보다 많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져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줄어들 것처럼 보이지만, 선택되지 못한 대안에 남는 미련이 오히려 합리적인 결정을 방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조차 쉽게 걸려들고 마는 지식착각에 왜 빠져들게 되는 걸까요?
하버드대 심리학과 학생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는 익숙함을 그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익숙한 것에서 비롯된 단순하고 낙관적인 추측이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익숙한 것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뇌는 가급적 힘든 일이나 예측 불가능한 것을 피해 에너지를 비축하려고 하는 본능이 이씩 때문에 자연히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하고 빨리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광고 삽입곡으로 한창 히트를 쳐서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노래를 쓰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익숙하고 친숙한 음악을 통해 그 제품이나 브랜드도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것은 광고계의 정통한 지식착각 전략입니다.
단번에 전문가라는 신분을 구별해주는 의상이나 복장 등을 입고 있을 때도 지식착각이 빨리 일어난다고 합니다. 전문가가 충고하면 어쩐지 무조건 맞는 이야기라는 느낌, 지식착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착각한 지식이 배신할 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양으로 승부한 정보에서 마냥 양질의 결과를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게다가 틀에 박힌 낡은 지식은 지혜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일찍이 지적하지 않았던가요? "지식의 가장 큰 적은 '무지'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의 착각(속임)이다."라고 말이죠.
당신의 착각은 자유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사방에 정보와 지식이 흘러넘치며 당신의 손가락 끝에 정보가 모여든다(Information at your fingertips)". 빌 게이츠가 1990년 컴덱스 쇼에서 연설한 말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슬로건이 된 문구입니다. 실제로 이제 길을 걷거나 밥을 먹으면서도 손끝만 톡 두드리면 금세 알고 싶은 정보가 눈앞에 쏟아집니다. '아는 것'이 넘치다 못해 홍수 상태인 것이죠. 이제는 그 많은 것 중에서 필요한 것만을 가려내는, 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린 진짜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식착각의 원리가 그렇듯 착각이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루어지는 뇌의 자연스러운 활동.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요?
답은 경계에 있습니다. 어차피 착각이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조금만 더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라는 게 전문가의 충고입니다. 다시 말해 혹시 지금 틀린 건 아닌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만 의심해 봐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착각은 의외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어쩐지 나는 이 분야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라는 생각, 바로 잠재력 착각입니다. 소질은커녕 간신히 평균에 턱걸이하는 정도의 감각이지만, 이 착각의 늪에 빠져 죽어라 연습하면 진짜로 이 분야의 최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착각은 자유고, 정답을 찾는 것은 당신의 몫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지식착각에 대한 이 기사 또한 당신에게 알면 병, 모르면 약이 된 것은 아닐까요?
출처 : 웹진 Pioneer 136호(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