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도 무거운 사진 이야기
가볍고도 무거운 사진 이야기
사진이 처음 발명된 이래 180여 년의 시간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은 문법을 만들고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하는 등 나름 역사적 성과를 이루어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성과 위에 오늘날의 사진 예술이 서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 사진을 구성하는 역사와 문법, 미학, 제도, 시장 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찍고 만든 사진이 어떤 사회적, 예술적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하는 문맹이 되기 십상입니다. 사실 사진은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쉽습니다. 아니 쉬워 보입니다. 일반인들이 취미로 하면서도 예술가란 타이틀을 얻기 딱 좋은 매체가 바로 사진입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인 사진 활동을 취미나 건강을 위해, 또 여가와 추억 만들기 등의 차원으로 즐긴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적 욕심이 있다면 달라집니다. 오늘날까지 현대사진의 가치와 문법을 만들어온 작가들과 그들이 이룬 성과를 알고 나면 현대사진, 혹은 사진 예술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초의 사진적 시각, 로버트 프랭크
현대사진의 신약성경이라고 칭송 받는 사진가가 있습니다. 바로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1924~)입니다. 그가 활동한 미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진가들을 비롯해 전 세계 작가들이 모두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는 1960년경을 전후로 일약 세계 최고의 사진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사진이 발명된 지 120여 년 만에 기존 미술의 시각이 아닌 사진적인 시각이라는 것을 최초를 찾아냈으니 이런 평가는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로버트 프랭크 이전에 사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사진의 구성을 보면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술에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해 400~500년간 서양회화가 만들어 놓은 원칙들, 화면 구성 원리들이 있는데,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은 그런 서양회화의 구성의식, 화면 구성 원리의 사진적인 결정판이라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회화적 시각에서는 벗어나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죠.
로버트 프랭크가 나타나기 전까지 사진가들에게 그는 전설 같은 존재였습니다.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로 축약되는 완벽한 화면 구성, 완벽한 셔터 찬스, 순간 포착 등 이런 사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미학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잘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사진가들 사이에서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 카르티에-브레송이 로버트 프랭크 사진을 보고 한 말이 "내 머리에서 폭탄이 터졌다"였습니다. 그만큼 프랭크의 사진이 던져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카르티에-브레송까지만 해도 없었던 사진적 시각이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에서 완전하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The Americans> (출처 : http://erickimphotography.com/)>
로버트 프랭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60년 미국에서 출판한 <The Americans>라는 사진집입니다. 그 사진들은 로버트 프랭크 스스로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진집 하나로 그는 여전히 존경받고 전설적인 사진가의 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이 사진집의 초판은 프랑스에서 발행되었는데, 그 초판을 접한 미국인들이 적극 받아들여 미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그 사진집이 소위 빗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 1960~70년대 히피 문화, 락 문화,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미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끼쳤던 영향과 충격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알아야 로버트 프랭크의 가치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먼저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로버트 프랭크가 어떻게 이런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해요.
사진가, 자신만의 관점을 담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로버트 프랭크는 대학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에서 당시 발행됐던 <파리 마치 (Paris-Match)> 같은 패션지에서 잡지사 기자로 일합니다. 전형적인 유럽인이었던 그는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안 미국이라는 사회를 아주 비평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라든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등 미국 문화라고 하는 것 모두가 로버트 프랭크의 눈에는 정상적인 문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란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 R은 프랑스 파리에서 십 년간 유학을 하고 학위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날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니 빨간 십자가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 십 년 동안 파리에 있었던 주인공의 눈에는 그게 마치 유럽의 공동묘지처럼 보이더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로버트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문화적 시각(Cultural Viewpoint)'이라는 것입니다.
<The Americans>라는 사진집에는 로버트 프랭크가 철저하게 유럽인이라는 시각에서 본 미국, 미국인들의 모습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1950년대 중반의 미국인들은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프런티어 정신, 아메리칸 드림 등이 상징하는 국가적인 자부심에 취해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미국인들의 모습이 프랭크의 눈에는 아주 부정적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잡지 일을 하던 프랭크는 그런 미국인들의 모습을 찍어야겠다고 결심하고 2년간 미국 전역을 차를 타고 누비며 보고 느낀 것을 촬영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포트폴리오를 기금을 제공해준 구겐하임 재단 측에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생각한 미국인의 모습을 담은 결과물이 아닌 터라 재단은 "모멸감을 느꼈다"는 당시 담당자의 말과 함께 더 이상의 지원을 중단합니다.
실망한 로버트는 프랑스로 돌아가 한 작은 출판사에서 그 사진들을 가지고 사진집을 냅니다. 그런 사연으로 1959년 그 책은 프랑스에서 출판되었고, 어쩌다 몇 권이 뉴욕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의 유명한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잭 케루악(Jack Kerouac)이 우연히 이 사진집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뉴욕의 예술가들은 물론 출판업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이 구겐하임과 관계없이 다른 출판사를 통해 <The Americans>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내에서 출판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이 책은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팔렸고, 미국 문화의 흐름을 이 사진집 한 권이 바꿔놓기까지 했습니다. 그때부터 로버트 프랭크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좋은 사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이 갖는 특징은 이렇습니다. 사진이 찍혔던 시대와 지역의 문화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진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화에 대한 이해가 사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코드가 되는 단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는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 로버트 프랭크가 그 문화의 기점이 된 것입니다. 즉 한국을 찍은 사진을 이해하려면 한국 사회를 알아야만 하는 사진 문화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로버트 프랭크, <Americans 중에서>, 뉴저지, 1959
1951년 뉴저지에서 촬영한 로버트 프랭크의 위 사진을 볼까요? 사진 속에 보이는 건물 벽 앞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서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경축하는 행렬이 브라스 밴드를 앞세우고 한창 퍼레이드를 하고 있고, 두 사람이 창문을 열고 이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미국 국기가 걸려 있는데, 로버트 프랭크가 보는 미국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있는데 이 둘 사이에는 완벽한 단절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개개인이 다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절된 상황이라는 것을, 사진에 있는 이 라인들이 둘 사이의 관계가 철저히 모르는 사이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사진을 찍은 로버트 프랭크의 관점에서는 서로를 모르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가 있습니다. 미국 성조기로 상징되는 국가주의, 그것이 바로 개개인들의 삶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로버트 프랭크는 이 사진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진에는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대중문화와 그 대중문화의 총아인 대중스타를 바라보는 대중들과 유리되게 초점을 흐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보이는 여자는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인 마릴린 먼로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입니다. 오히려 배경으로 깔린 먼로를 선망하는 대중의 모습에 초점이 맞아 있습니다. 자칫 잘못 찍은 실패한 사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대중이 생각하고 선망하는 마릴린 먼로는 실체가 아니라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 즉 이미지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를 선망하는 대중은 실체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프랭크는 매스미디어의 인간 소외 현상, 스타를 갈망하는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이 갖는 허전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시대의 '완벽한 사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진은 구도도 이상하고 전체적으로 엉성한 사진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사진에 로버트 프랭크만의 새로운 관점이 있습니다. 기존의 사진을 잘 찍는다는 기준과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대신 로버트 프랭크는 사진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의 사진들이 보여주었던 회화적인 구도, 조형적인 아름다움, 그런 것보다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해석하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진이 갖는 메시지이고, 우리가 사진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출처 : 웹진 Pioneer 136호(7월호)